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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lling

정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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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밤, 내일모레 서류 접수 마감 일자지만 친구의 유혹에 이기지 못해, 결국 오늘도 이 술집에 왔다. 어김없이 SNS상에서만 눈팅으로만 흘깃거리던 사람들은 이 술집 많은 거리에 볼이 발그레한 채로 돌아다니고 있었다. 서로 얼굴은 알지만 쳐다만 보고 지나가는 사람들도 있었고, 어떤 사람은 서서 담배만 피우고 있어도 지나가는 사람들이 줄을 서서 그 사람에게 인사하는 광경도 볼 수 있다. 무리를 지어 다니는 사람들, 잘생긴 커플이 지나갈 때도 있었다. 이 추운 연말에도 다들 어김없이 나와서 술자리에 앉아 있다.

“야, 원래 자소서 안 써질 때는 술이 최고다. 알지?”

준혁이는 내 술잔에 소주를 따라주었다. 그리곤 이윽고 본인 잔에 소주를 부었다.

“야, 지금 나 재수 없어지라고, 혼자 자작하는거지? 지는 애인 있다고.”
“곧 너도 취직하고 만들 거잖아. 네 얼굴이면 금방 만나. 야, 짠”

챙-

두 소주잔이 부딪치며 나는 소리가 마치 권투장 위의 공소리 마냥 울렸고, 그 소리에 맞춰 일주일간 있던 일들, 그리고 SNS상에 있던 일들, 자기가 겪은 일들 할 거 없이 상위에 안주 대신 풀어놓기 시작했다. 안주가 나오기 전에 소주 한 병을 비운 그들은 이미 신난 상태였다. 소주 두 병 째 달릴 무렵, 우리는 과거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대학교 학창시절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준혁이는 대학교에서부터 사귀고 지금까지 만나는 중이다. 그 당시, 대학교에서 만난 선배와 함께 4년 정도 만났는데, 둘이 죽이 잘 맞는 걸 보면, ‘아, 게이도 결혼할 수 있겠다.’라는 생각을 가끔 하곤 한다. 준혁이에게도 잘 만나는지 물어보면, 아직도 애틋하다고 한다. 신기할 따름이다. 아직 나는 길게 만나본 적이 없어, 길게 만나는 연애를 하면 어떤 기분일까, 라는 의문을 가지곤 한다.

“요즘 너, 남자는 만나냐? 그렇게 SNS도 하고, 어플도 하면, 주변에서 연락 올 거 아냐”
“지금은 어플하는 시대는 갔지. 다 SNS로 이야기하고, 대화하고, 소통하는 시대니까. 근데 난 SNS로 만나는 건 별로라….”
“왜? 네 사생활 다 까발려지는 것 같아서?”
“뭐, 약간 그런 것도 있고. 아니, 그냥 나는 우연한 만남이 좋은 것 같아”
“진짜 네가 미쳤구나! 드디어. 그런 게 어딨냐? 막말로, 여기서 눈 맞아서 커플 된다고 해도, 오래갈 확률도 낮겠다.”
“어플이나, 오프라인에서 눈맞는 거나…. 그게 그거 아냐?”

“야, 태우야 잘 들어. 게이들은 오프라인에서 절대 먼저 들이대지 않아. 만일, 들이댄다고 하더라도 술 취해서 그 날 하룻밤 너를 노리는 늑대일 뿐이야. 남잔 다 늑대라니까?!”
마치 드라마 대사처럼 뱉은 말을 끝맺으면서, 준혁이 손은 이미 손 부채질을 하며, 한껏 끼를 발산하고 있었다. 마치 그간 못 부렸던 끼를 방출하듯. 콧소리와 함께.

“술이나 마시자, 연애랑 취업 이야기하면 우울해”
“아니,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먼저 들이대 봐. 솔직히 오프라인 만남에서 성사될 수 있는 확률이 높은 건 아무래도 먼저 다가가는 거 아니겠어?”

민혁의 말이 맞다. 아무래도 호감을 느낀 사람이 상대에게 먼저 다가가야, 아무래도 성사될 확률이 높겠지. 그만큼 경우의 수가 늘어나니까. 하지만 민혁이가 저런 말을 나에게 하는 이유는 어떠한 순간에도 먼저 말을 거는 타입이 아니라는 것이다. 술집이나 클럽에서 지나다가 호감이 가는 상대를 보아도 ‘저 사람의 식이 나는 아니겠지’라는 생각이 먼저 앞서 미리 포기하는 타입이기 때문이다. 몇 년간, 오프라인 활동을 해도 만나는 사람이 안 생기는 이유는 아무래도 ‘내 자존감’의 문제라는 결론으로 직결되었다. 심지어 내 현재 상황이 취업도 못 하고 있어, 경제적인 상태가 넉넉한 편이 아니다 보니 더욱 자존감은 밑으로 내려가는 듯했다. 이렇게 위축되어 있으니 상대들도 나에게 먼저 연락할 생각을 안 하는 것이라는 생각도 해본다. 내가 자존감 있는 모습을 보여줘야 상대도 그에 상응하는 반응을 해줄 텐데, 오히려 나는 위축되듯 자존감 낮은 상태를 보여줘서 다가오는 상대들의 호감도를 갉아먹어 버린다.

그렇게 그 술집에서 다섯 병이 넘는 술을 마시고, 신나는 기분에 주변의 바에서 와인까지 마셔 해롱해롱한 상태가 되었다. 술이 떡이 되진 않았다. 이 정도로 취한 둘이 아니므로.

“원래는 이 정도 먹고 클럽까지 가줘야 하는데~”
“너희 형이 안 좋아하잖아. 그냥 집에 가자.”
“아우~ 그러니까~ 진짜 가고 싶은데.”

준혁의 애인은 준혁이가 이태원 클럽을 갔다 오면, 다음 날 저녁까지 자는 모습을 보기 싫다고 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친구가 이태원에서 술을 안 먹고 노는 타입도 아니다 보니, 이태원 가면 술이 떡이 돼서 다음 날 저녁에 일어나는 게 일상이다. 그렇다 보니 준혁은 자연스럽게 이태원 금지령이 내려졌고, 나 또한 준혁이 가지 않으니 이태원에 갈 일이 비교적 적어졌다. 최근에 새로운 콘셉트의 술집도 많이 생겼다고 하여, 가보고 싶긴 하지만. 오늘은 날이 아닌 것으로 하고 준혁을 먼저 택시 태워 보낸 뒤, 나는 심야버스가 있는 정류장으로 갔다. 밤바람이 차가우니 아까 먹은 술이 약간 깨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꽤 차가운 바람이지만 술기운이 이미 온몸을 덮고 있었다. 버스 정류장의 의자에 걸터앉아 버스가 오는 전광판을 보고, 내 버스가 24분 뒤에 온다는 것을 확인한 뒤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고 같은 주머니에 들었던 이어폰을 꺼내서 귀에 연결했다.

아까 준혁이가 술집에서 켰던 어플 때문인지, 어플 알람이 여러 개 와있었다. ‘다 술 먹고 번개겠지 뭐’라는 생각에 들어가서 읽고 지나가려고 어플을 실행했다. 6개 정도의 메시지와 알람을 읽고 무시하려고 하는데, 근처의 있는 사람들이 갑자기 궁금해져, 근처의 사람을 둘러봤다. 리스트를 내리려고 ‘근처’ 메뉴를 클릭하는 순간, 내 프로필 사진 바로 옆의 남자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작은 프로필 사진에서도 느껴지는 그의 아우라는 나의 엄지손가락을 그의 프로필로 이끌었다. 사진빨이겠지라는 생각을 잠깐 했으나, 상세 프로필을 읽은 나는 온라인의 그 남자에게 푹 빠져버렸다. 나만 이런 경험이 있는 것인가? 모두 똑같은 경험이 있을지도.

- 이렇게 키 크고 훈훈한 건장한 사람이 날 좋아할 리가.

라고 생각하며 어플을 종료했다. 이렇게 잘난 사람에게 말을 걸어봤자 진전없는 대화만 오고 가다 끝나거나, 차단당하거나, 읽씹 당하거나.. 결국, 나는 그 정도니까.
그럴 거라는 생각을 하고 정신을 차렸더니, 몸을 덮고 있던 술기운이 증발했는지 찬 바람이 몸속으로 스며들어왔다. 버스정류장의 전광판을 다시 들여다봤고, 버스 도착 시각은 22분이 남았다고 떠 있었다. 심야버스를 기다리는 시간은 너무 느리게 흘러가는 것 같다. 추워서 앉아있던 의자에서 일어나 건너편의 편의점에서 따듯한 음료수를 사려고 일어나려는데, 일어나는 찰나에 앞서 지나가던 사람의 팔꿈치에 내 머리를 갔다 박았다.

“으. 아파….“
“괜찮아요? 그냥 지나가도 안 부딪치고 지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거리었는데... 갑자기 일어나셔서.”
“아.. 아니에요.. 어?”

내가 술이 꽐라가 된 것이 아니라면, 방금 저 사람의 팔꿈치가 내 머리를 치면서 마법을 건 것이 아니라면, 이 사람은 아까 어플의 프로필. 그 사람이 맞다. 그래서 얼굴을 보자마자 나도 모르게 반응했다. 마치 이전에 한 번 봤던 사람처럼.

“음? 저 아세요?”

라는 그의 물음에, 순간 얼어붙었다. 내가 알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맞는 것인지, 어플에서 봤다고 솔직하게 말해야 할지. 아니면 그냥 지나치는 것이 맞는 걸지. 하지만 이 순간이 지나면 다시 돌아오지 않을 텐데. 이렇게 부딪히는 일이 생기지 않을 것이다. 아 물론, 다른 술집이나 클럽에서 만날 수 있겠지만. 이렇게 30cm 이내의 거리에서 이야기할 일은 없을 것이다. ‘먼저 들이대’라고 조언한 준혁의 말이 순간적으로 뇌를 스쳐 지나가면서 나는 입을 열었다.

“아, 방금 어플에서 봤어요.”라고.

잠깐 당황한듯한 그 사람의 표정을 본 것 같았는데, 그 표정은 눈을 잠깐 깜박한 사이에 사라졌다. 그러고선 자신의 폰을 열어서 무언가 터치하더니, 나에게 자신의 핸드폰 속 내 프로필을 보여주면서 말을 꺼냈다. 경찰이 구속 영장을 들이밀듯 내 눈앞에 있는 내 프로필은 내 사진 몇 개만 있고 내용이 없었다.

“음.. 그쪽이, 이 사람이에요? 보고 간 사람 기록에 남아있네요”
“.. 아, 네”
“프로필에 글 내용은 아무것도 없네요.”
“뭐, 적어도 안 적어도. 큰 상관이 없을 것 같아서요”
“뭐 그렇죠. 숫자랑 사진만 보는 세상이니”

그 대화가 끝나고, 약간의 정적이 흘렀다. 그 사람과 내 목소리가 멈추는 순간, 그 사람과의 거리가 30cm에서 30m로 멀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렇게 대화가 끝나고 버스가 오면 서로 집에 가겠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게다가 사실 대화를 끌고 갈 거라고 생각을 못했다. 단순히 부딪힌 것에 대한 사과만 받고 지나가려고 했는데, 그 상황에 얼굴을 보고 반응한 내가 잘못했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음… 혹시 집에 가는 길이에요?”
“아, 네. 집에 가야죠. 버스 기다리고 있어요”
“그래요? 어디 살아요? 저도 버스 타려고 온 건데”
“저는 동쪽으로 좀 가야 해요. 저기 15분 뒤에 오는 버스요”
“어? 저도, 그쪽으로 가는데. 저 버스로”

이야기를 더 나누어보니, 우린 바로 옆 동네는 아니지만 15분 정도 걸리는 거리에 살고 있었다. 서로 동네에 있는 맛집 이름을 말하거나, 다녔던 중고등학교를 물어보기도 했다. 둘 다 근처에서 20년 넘게 살았던 내용의 이야기를 주고받으니, 어플에서 본 나랑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아닌 고향 친구와 대화하는 느낌이 들었다. 통성명까지 하고 나니, 시간이 다 되었다.

- N57번 버스가, 곧 도착합니다.

“어? 버스 온다.”
“심야버스에 앉을자리 없는 건 알죠?”
“알죠. 근데 혹시 집에 바로 가야 해요?”
“아뇨”
“그럼, 우리 집에 보드카가 남은 게 좀 있는데… 같이 한잔하고 갈래요?”

이 사람의 의도가 뭔지는 파악했다. 하룻밤일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약간 머뭇거리긴 했지만, 방금 대화로 이 사람과의 벽이 조금 허물어졌달까. 그리고 준혁이의 ‘먼저 들이대!’라는 조언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상대의 용기 있는 호감 표시, 그리고 대화를 먼저 이끌어감에 대한 성의를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대답했다.

“그럼, 토닉 워터만 사가면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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